동몽선습은 엄밀한 의미에서 고전은 아니다.엄밀히 말하자면 절반에 해당된다고 말할까. '고전'의 '고(古)'에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고전이 성립하기 위해 갖춰야 할 자질의 단 하나. 그저 오래되었을 뿐 오늘날 우리에게 그것이 새로운 앎을 창출해내는 창조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학교 폭력으로 아이들이 자살했다. 그렇게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사람에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왜 아이들은 예전보다 많이 배우고 많은 것들 갖지만 행복하지 않으며, 처절하게 미숙할까. 지난 몇달 내 머리 속에 자리잡은 몇 가지 의문 때문에 나는 이 책을 교보문고에서 발견했을 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것은 물론 균일가 2000원에 매혹된 것이기도 했다.
이 책은 근대 이전 어린이들이 천자문을 떼고 처음으로 배우던 '몽학류'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몽학류'의 대표격인 동몽선습을 비롯해 근대에 발행되었던 동몽의학, 유몽선습 등이 함께 실려 있다. 후대에 발행된 책들이 선조인 동몽선습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고, 제목마저 같은 책들을 각기 다른 이가 내기도 해서 지금같으면 표절 시비가 일어도 할 말이 없을 책도 있다. 물론 근대 이전 사람들의 '개성' '독창성'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 현격히 다른 것이었다.
이런 당황스러움이야 사실 별다른 것이 아니고 오늘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마주치는 가장 큰 장벽은 아마 문자의 문제일 것이다. 다행히 현대어역이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어려운 부분은 그 내용이다. 문장이나 내용 자체가 가진 어려움이 아니라 현대와 완전히 다른 세계관 위에 서 있는 당대의 인식이 우리의 판단을 가로막는다. 박세무의 동몽선습은 오륜에 해당되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 중국의 대략적인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조선시대 천자문을 뗀 아이들이 익혀야 할 지식의 가장 기반이 되는 내용,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위계질서를 강조한 이런 가르침이 뼛속 깊이 당대의 봉건사회를 위해 봉사했으리라 생각될 것이고, 동시에 오늘날과 같은 평등하고 보편적 인간상을 간직한 현대인들에게 낡고 전근대적인 굴레로 느껴질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그럼에도 상당히 소구력 있는 가르침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오늘날 아이들이 조기교육부터 시작해서 배워야 하는 그 수많은 지식들의 내용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동몽선습에 나온 가르침들은 그렇지 않다. 그 학문의 지식들은 곧 '사람됨'을 위함이었다. 배우고 익히는 사람만이 사람일 수 있다는 반복적 가르침은 너무도 당연해서 우리에겐 잊혀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대체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그저 머리 속에 뭔가를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반면 동몽선습, 전근대의 가르침은 그 목적이 매우 구체적이었고, 실생활과 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실용이라고 말하는 지식들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근대에 타기되어야 할 대상이 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가르침의 내용이 낡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그 내용을 진부하게 만든 것이라 봐야 한다. 오륜의 가르침은 철저히 '관계'를 지향한다. 이것이 얼마나 실용적인 것인가. 사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이 관계 속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관계는 인간의 전부이기도 하다. 어떤 실용적 지식도 이러한 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넘어설 수 없다.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만 제대로 하고 살 줄 알아도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낡은 가르침이 오늘에도 의미있는 것은 그것이 이론으로서는 진부하지만 실천으로서는 참신하기 때문이다.
조선 500년이란 강고한 역사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선을 이끈 사대부 역시 이러한 '관계'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우며 자란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독서라도 각인되고 행동에 제약을 가하기 마련인데 그들은 이것을 외울 정도로 되풀이해 되새김질했다. 우리가 오늘날 그토록 뽐내는 첨단의 지식이 우리를 얼마나 오랜 기간 지탱시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사라진 왕조는 태생적으로 약해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큰 거인이 될 지 그들에 못 미치는 난쟁이로 사라질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들 500년의 왕국을 세우고 성숙시킨 인큐베이터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이 아는 것이 힘인데 그들의 앎은 항상 성숙한 인간관계를 지향했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당대 사대부들은 많이 알 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도구, 즉 '관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아는 놈들이 성격까지 좋아 그 아는 것 때문에 미움받지 않고 가진 것을 잘 지켜나갈 수 있는 구조를 지향했다는 것이다.(역사적 사실이야 별개로 여기선 그 지식의 내용만을 언급할 뿐이다.)
시기적으로 가장 후대인 1926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간행된 유몽선습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애물
이미 사람 사랑할 줄 알면 마땅히 물건 사랑할 줄을 알지니, 대범 생명의 물에 진실로 세상에 해됨이 없는 데 부친 자면, 비록 곤충 초목의 세미한 데 이르러도 다 가히 무고히 베고 멸하지 아니할 것이오, 계견과 마우 등 같은 물건은 항상 사람에게 의뢰하여 생활하는 자이니, 마땅히 애호하여 과히 죽이지 말며 학대치 말지니라. 무릇 사랑이란 자는 만물 천성 중에 진실로 있는 바 아름다운 덕이라. 고로 이 아름다운 덕을 사해 만물지간에 미루면 사해가 다 화평하고 만물이 다 강녕할지니, 성인이 이것으로 천하를 기르며, 만물을 장양한 자가 이것이니라.
도리어 오늘날 현대적으로 읽히는 부분이다. 봉건 조선이 근대로 가기 위해 버려야 했던 부분이기도 하고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렸기에 되찾으려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전근대는 우리가 그토록 복구하려는 자연에 대해 동반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학문해서 나 한 사람 잘 되고 남보다 편히 사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나 한 사람 잘 되고 남보다 잘 살려 하다보니 그 남들과 함께 살기 버거워 모든 관계들에서 파열음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가르침은 왜 이런 결과들을 가져오게 되었을까. 예전보다 더 풍부한 읽을거리와 놀거리를 가진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지도 더 바르게 자라지도 않는다. 많은 아이들이 아마도 더 많이 알고 배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뭘 배우고 있는 것인가. 그 지식들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다.
유몽선습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효순이 사람에게 있어 중대한 일이고, 또한 아주 높고 멀리 있어서 실행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반드시 학문에 의뢰하여 아는 것이니, 학문의 방도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장차 옛날과 오늘의 도리를 시원하게 꿰뚫고 사리를 훤하게 깨달아 마음에 간직하고 몸에 베어들게 하는 데 있으니, 학문하는 공력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근대 조선은 나, 그리고 남을 위해 학문을 해야했다. 그 학문이 어떻게 오용되었건 학문이 지향하는 바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나와 또한 또다른 내가 되는 남이 있었다. 우리는 철저히 '나'만 존재하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 우리들이 아주 짧은 역사만을 갖고 고립되어 사라진다면 그것은 그 안에 '나'만 있는 외롭고 고독한 지식때문일 것이다. 과거를 얕보지 말고 정신 차리자.
어떤 분야에서든 만년 2인자라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상에 오르기를 포기할 만큼 정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가까이 있죠. 눈에 뻔히 보이는 정상에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다면 그 안타까움은 아예 보지 못했던 이보다 더 큰 것일 겁니다. 이런 심리를 그려낸 것이 영화 ‘아마데우스’죠. 모차르트를 경외하며 한편으로 질투에 몸부림치는 살리에리의 모습을 지독할 만큼 솔직하게 보여주는 영화였죠. 실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관계가 그랬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평범한 모든 이들의 숨겨진 열등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갖는 영화였습니다.
(현역 시절의 제인 토빌과 크리스토퍼 딘)
그럼 아이스댄싱의 세계에서는 어땠을까요. 전에 영원한 1인자 ‘토빌과 딘’ 커플의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들이 현역으로 아마추어를 제패하던 시절의 2인자는 누구였을까요? 함께 경쟁했으나 토빌과 딘을 항상 한 발짝 뒤에서 바라봐야 했던 베스티미아노바와 부킨? 혹은 두 발짝 뒤에 있었던 클리모바와 포노마렌코? 이런 추측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포디움에서 2위와 3위를 차지하던 그들 조는 사실상 1인자 대기조였습니다. 토빌과 딘이 은퇴한 후 베스티미아노바와 부킨 조는 1988년 동계올림픽까지 항상 1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은퇴한 후엔 클리모바와 포노마렌코 조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요.
(나탈리아 클리모바와 안드레이 부킨)
(마리나 클리모바와 세르게이 포노마렌코)
그렇다면 이들 1인자, 혹은 1인자 대기조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있었으나 포디움에 오를 수 없었던 이들, 그래서 1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결국 대중에게 잊혀진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미국의 주디 블룸버그와 마이클 세이버트 조, 영국의 니콜라스 슬레이터와 카렌 바버 조 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2인자란 바로 이들 같은 사람들일 겁니다.
(카렌 바버와 니콜라스 슬레이터)
1인자를 바라보는 2인자의 적나라한 시선을 이야기하며 영화 속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했었죠. 그렇다면 이들 2인자는 당시의 1인자 토빌과 딘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실제 이 흥미로운 회고담이 영국의 메일온라인에 실린 적 있습니다. 바로 같은 영국 국가대표 아이스댄싱 선수였던 니키 슬레이터의 이야기입니다. 메일온라인에서는 2009년 당시 2월 14일이 다가오자 25년 전 바로 그날 올림픽 우승을 차지했던 토빌과 딘을 기억하는 기획의 하나로 당시 함께 선수생활을 했던 니키 슬레이터에게 그들을 회고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선 참 잔인한 일입니다. 니키 슬레이터는 선수생활 내내 영국 국내에선 토빌과 딘에 이어 2위였고, 세계 랭킹으로는 5위였으며, 주요대회에서 올린 최고의 성적이라면 토빌과 딘이 참가하지 않았던 1983년 유럽 선수권에서 3위를 차지한 것이 전부입니다. 특히 토빌과 딘조와 함께 뛰었던 1984년 올림픽에서 그는 카렌 바버와 함께 그들 자신의 세계 랭킹보다 한 단계 낮은 6위에 그쳤죠(이것도 대단히 훌륭한 성적이죠. 만일 자국 내에 세계챔피언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존재도 그림자같지는 않았을 겁니다). 1984년 2월 14일, 토빌과 딘은 빛났고, 바버와 그는 대중들의 관심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선수생활은 계속되어야 했고, 그 뒤로도 아마추어로 활동했지만 결국 인상적인 성적을 남기지는 못합니다. 선수 시절 항상 2인자에 머물렀던 것으로도 모자라서 25년이 지나자 누군가에게는 뼈아픈 실패로 기억되는 그 올림픽을 1인자를 위해 회고해야 한다는 것. 2인자의 인생은 끝까지 잔인하네요.
어떻든 그의 회고담은 무척 재미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토빌·딘과 같은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탔던 그는 이러한 기획에 적임자임엔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토빌과 딘이 간판으로 나온 ‘댄싱 온 아이스’엔 선수시절 파트너였던 카렌 바버(이 분이 바로 이혼한 딘과 염문을 뿌리셨더랬죠)와 함께 심사위원으로 출연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는 1984년 토빌과 딘의 프리댄스 프로그램이었던 ‘볼레로’의 우아함과 열정을 대체 누가 잊을 수 있겠냐고, 마땅한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면서 4분을 넘기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프리댄스 프로그램의 규정을 영리하게 피해간 그들의 영리한 안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이건 아주 유명한 일화죠. 토빌과 딘은 ‘볼레로’를 그들의 프리댄스 음악으로 선정한 뒤 17분 가량의 음악을 4분 18초까지 압축했지만 도저히 그 이상 줄일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스케이트의 양 날이 빙판에 닿은 이후부터 프로그램 시간이 산정되는 규정을 이용해 18초간 자신들의 스케이트 날이 빙판에 닿지 않도록 무릎을 꿇은 채 경기를 시작하죠. 몸을 움직이고 리프트를 하면서 18초가 지난 후에야 스케이트 날이 빙판에 닿도록 말이죠.) 니키는 그들의 그 18초 간의 ‘불법적(illegal)’ 퍼포먼스를 놀라움과 존경을 담아, 한편으론 쓰라린 마음으로 지켜봤을 겁니다.
그는 곧 자신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이스댄싱으로 피겨를 시작했습니다.(토빌이 페어 스케이팅에서 싱글로, 딘을 만나며 아이스댄싱으로 옮겨간 것과는 달리 아주 일관된 커리어라고 하겠죠.) 그들 각각은 당시에는 다른 파트너(크리스토퍼 딘은 산드라 엘슨과 니키 슬레이터는 케스린 윈터와)와 스케이트를 탔습니다. 아이스댄싱의 세계에서 파트너와의 만남과 이별은 다반사이니 그들이 애초에 만났던 파트너들과 끝까지 갈 수 있었다면 그것이 더 특수한 경우였을 겁니다. 어떻든 각자 다른 파트너와 스케이트를 타던 그 시절 니키는 자신이 매우 빈번히 딘을 이기곤 했다고 기억합니다.(딘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순 있겠지만 이건 자신과 딘의 실력엔 큰 차이가 없다고 얘기한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적어도 당시에는요.
세월이 좀더 지나 그들이 더 성장하자 크리스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1인자가 되었고, 자신은 그 뒤를 바짝 쫓는 2인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솔직히 딘의 의상을 들여다보고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낸 후 자신의 팀도 같은 곳에서 경기 의상을 맞추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스댄싱 선수에게는 온아이스에서건 오프아이스에서건 모든 사소한 디테일과 행동이 다 문제가 되고 주목받기 때문에 자신 역시 같은 곳에서 의상을 맞추게 되었다고요.(지난 시즌 아사다 마오 선수가 김연아 선수의 의상을 디자인 했던 캐나다 디자이너에게서 의상을 맞췄던 것처럼 말이죠.) 1인자가 되기 위해 일단 그를 따라가는 겁니다.
모든 사소한 것들이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올바른 파트너십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다는 매우 지당한 말로 니키는 슬슬 토빌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만일 딘과 자신이 파트너를 바꿔 자기가 토빌과 또 딘이 카렌과 팀을 이뤘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 모른다고요.(정말 그럴까요? 저는 그렇다면 세계랭킹 1위와 5위의 팀이 탄생하는 대신 2위와 4위, 혹은 3위와 4위 정도의 팀이 탄생하는 데 그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파트너가 다른 누군가였다면, 나는 1인자였을 것이다...와 같은 회고는 아이스댄싱의 세계에서 일리야 아베부크 정도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랑 때문에 파트너를 바꿨던 그는 전 파트너였던 마리나 아니시나의 조에 밀려 그들 조가 현역에 있을 당시 주구장창 포디움 2인자였죠. 그는 또다른 의미의 2인자입니다.)
그는 아이스링크에서 처음 봤던 제인 토빌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가 처음 토빌을 봤을 때 그녀는 아직 페어스케이터였습니다. 마이클 허친슨과 짝을 이룬 그녀는 당시 영국 주니어 챔피언이었죠. 곧 시니어 챔피언이 되었고요. 그는 쓰라리게 회고합니다. 토빌이 바로 딘을 금메달로 이끈 티켓이었다고요. 이 표현에는 그가 그 티켓을 쥐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베어 있습니다. 마치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티켓이었던 것처럼요. 당시에 그가 그 티켓을 쥐어볼 생각은 했는지 의문입니다.
제인 토빌은 우월한 스케이터였다고 니키는 평가합니다. 아이스댄스의 파트너십에서 종종 여자 선수들은 강력한 힘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인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리프트 동작을 할 때 스스로 자신의 자세를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제인의 다양하고 아크로바틱한 리프트는 유명하죠. 지금은 또 다르지만 당시 제인과 같이 쉽게 리프트를 할 수 있는 여자선수는 드물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제인이 아이스댄싱 선수가 되기 전 리프트가 중시되는 페어 스케이터였고, 그 가운데서도 자국 챔피언을 할 정도의 훌륭한 선수였던 점을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점프와 스핀을 할 수 있었죠.(아이스댄싱엔 점프가 없습니다. 이 또한 전직 페어 스케이터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죠.) 때문에 이런 기술을 기반으로 한 토빌에 맞춰 딘은 많은 다양한 안무와 리프트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니키가 생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점은 그녀가 두려움이 없었고 이미 챔피언으로서 유리한 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토빌은 같은 링크장에서 딘을 만났고, 니키 역시 자신의 전 파트너와 의견 차이로 헤어지고 새로운 파트너 카렌 바버를 만나 새롭게 시작합니다. 카렌은 명랑하고 멋진 금발에 아담한 많은 자질을 갖춘 소녀였지만 제인같은 능력을 갖고 있진 않았다고 그는 이야기합니다. 이 바로 다음에 빌과 딘이 그들을 앞질러 갔다고 말하고 있으니 사실 암묵적으로 자신이 딘을 앞서 갈 수 없었던 것은 파트너 때문이었다고 말한 셈입니다.
그는 토빌과 딘이 영국 최고의 코치 베티 켈러웨이를 만나면서 그들만의 색깔을 갖춘 팀으로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자...의상에 이어 다음은 무엇을 할 차례? 그렇죠. 빙판 위에서 혹은 밖에서의 모든 것이 중요한 아이스댄싱 선수입니다. 그는 당연히 베티를 찾아갔고, 그에게 자신들의 팀을 코칭해달라고 부탁합니다.(그 전까지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코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보통의 극성스런 피겨맘이었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그의 어머니, 조안 듀허스트는 그의 아버지 존 슬레이터와 함께 아이스댄싱 영국 챔피언이었고, 1952년과 1953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던 탁월한 선수였으니까요) 그러나 베티는 거절하죠. 이미 제인과 크리스만으로도 할 일이 많았을 테고 랭킹 상위권의 두 팀을 함께 코칭하는 일의 복잡 미묘함을 피해가려 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이 일도 아사다 마오 선수쪽에서 김연아 선수의 코치이던 당시의 브라이언 오서에게 코칭을 제의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코치인 베티 캘러웨이와 함께 한 토빌&딘)
니키는 ITV로부터도 토빌과 딘에 대해 회고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답니다.
“당신은 경쟁할 때 일어나는 일을 생각할 수도 없을 겁니다. 우선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봅니다. 만일 그들이 더 잘 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일단 따라하겠죠. 그리고 당신이 목표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의상도, 코치도 따라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따라하려 했던 니키도 결코 따라 할 수 없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파트너십'이죠. 그는 토빌과 딘은 ‘파트너십’이라는 말을 몸소 구현한 커플이라고 말합니다. 크리스는 그 파트너십에서 안무가이고, 제인은 자신의 페어스케이터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한다고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겁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우회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파트너였던 카렌을 제인과 비교하며 커리어의 아쉬움을 그녀 탓으로 돌렸을 때 사실 그 스스로 자신들이 목표에 이르지 못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을 마음 깊은 곳에서 인정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한 ‘올바른 파트너십’
안철수 교수의 아내 김미경 교수가 최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 마지막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려달라는 말에 이렇게 얘기를 했었습니다.
"아, 어렵다. 글쎄, 파트너십 아닐까. 미국 판례에 파트너십에 대한 정의가 있다. 파트너와 파트너의 관계는 최상의 믿음, 신뢰의 관계다. 심지어 파트너십이 해제된 다음에도 지속되는 것이 파트너 관계다. 파트너는 두 개 이상의 개체이지만 실제로는 한몸으로 여겨져서, 한 명이 빚을 지면 공동으로 책임지고, 수익을 내면 공동으로 누린다. 부부도 그와 같지 않을까. "
(옥사나 그리슉과 예브게니 플라토프)
그렇다면 토빌과 딘은 바로 그 파트너십이 해제된 다음에도 지속되는 파트너로서 진정한 파트너십의 구현자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들보다 더 화려한 성과를 거둔 유일한 팀, 실제 아마추어 무대에서 그들을 이기기도 했던 그리슉과 플라토프조가 아이스댄싱의 역사에서 토빌과 딘보다 덜 인정받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파트너십일 겁니다. 아마추어를 은퇴하고 더 이상 절실한 승리가 필요하지 않을 때 상대와 바로 등돌려 버린 그들의 살얼음판 파트너십. 그럼에도 그들조차 인정한 것은 빙판 밖에서야 어찌되었든, 빙판 위에서 만큼은 상대방의 실력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인자 니키의 회고는 결국 그가 갖지 못했던 진정한 파트너십의 증명 아닐까요.
남과 남으로서 수십년 지속된 파트너십은 아직도 현재 진행중입니다. 그 파트너십이야말로 2인자가 가장 훔치고픈 1인자의 보물이겠죠.
지금 당신에겐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가 있습니까? 그 동반자는 누구입니까? 남편, 아내, 연인? 대답은 여럿일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 동반자와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1대1 대응을 이루는 특별한 짝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 동반자가 그런 흔한 관계의 누군가가 아니라면. 혹은 내 동반자에게 나와 같거나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동반자가 있다면, 그 때 당신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이것은 파트너십, 언어의 한계로 규정하기 어려운 동반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형제도, 부부도, 연인도 아니지만 36년을 함께 한 사람들. 자신의 배우자들보다 더 오랜 시간 함께한 그들. 그리고 각 배우자와 이룬 것보다 더 큰 것을 함께 이뤄간 그들.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 파트너십. 그 주인공은 제인 토빌(Jayne Torvill)과 크리스토퍼 딘(Christopher Dean)입니다.
2010년 여름 미국 피겨스케이팅 협회(USFSA)에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케이터를 뽑는 인터넷 투표에서 김연아 선수가 우승을 했었죠. 싱글, 페어, 아이스댄싱을 합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선수들을 64팀 뽑아대진표를 짠 뒤, 각 대결에서 이긴 팀이나 선수들이 32강, 16강... 이렇게 차례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치러졌죠. 그 때 김연아 선수가 결승에서 만난 스케이터가 토빌과 딘이라는 아이스 댄싱팀이었습니다. 아마 피겨스케이팅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김연아 선수가 우승했구나... 토빌과 딘이라는 스케이터들이 있었구나...정도로 넘어갔겠죠? 피겨스케이팅을 좀 아는 사람들에겐 토빌과 딘은 특별합니다. 그들이야말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진정 위대한 스케이터들 가운데 위대한 스케이터라고 할 수 있는 팀입니다. 벤쿠버 동계올림픽 폐막식 때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대회 최고의 선수로 김연아를 꼽으면서 “84년 사라예보 대회 아이스댄싱에서 제인 토빌-크리스토퍼 딘(영국)의 연기를 본 이래 최고의 연기였다”고 말한 것은 정말 최고의 극찬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여기 자크 로게 위원장이 말한 최고의 연기 ‘볼레로’가 있습니다.
‘볼레로’에 대한 그 유명한 이야기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저 여기선 보고 느낄 뿐.
그들의 의미를 정리하자면, 오늘날의 아이스댄싱이 가능하게 한 진정한 의미의 모태이며, 영원한 전범,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 이후 아이스댄싱은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에 첼리스트 요요마는 바흐의 첼로 모음곡을 주제로 한 자신의 영상음반을 내면서 토빌과 딘을 바흐의 음악을 구현할 스케이터로 추천한 바 있습니다. 그때 그는 토빌과 딘이 첼로에 있어 바흐가 한 역할을 아이스댄싱에서 이루어 낸 팀이기 때문에 바흐를 주제로 한 작업에 적합할 거라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피겨스케이팅 팬이라면 공감할 만한 얘기입니다.(이 때 이들의 작업물은 6 Gestures라는 DVD로 나왔습니다. 이미 품절되어 시중에서 구하긴 어렵지만)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어떻게 만났을까요?
노팅험 출신으로 1957년생인 제인 토빌은 8살 때부터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노팅험 출신에 1958년생인 크리스토퍼 딘은 제인보다 조금 늦은 10살 때부터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죠. 그 둘은 같은 스케이팅 클럽에 있었고, 이미 팀을 이루기 전 서로 아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이건 그야말로 ‘아는 여자’ ‘아는 남자’ 같은 사이로 인사 정도나 나누는 사이였다는 것이죠.
제인 토빌은 애초엔 페어 스케이터로 시작했습니다. 마이클 허친슨과 팀을 이뤄 12살에 페어스케이팅 영국 주니어 챔피언이 되었고 그 다음해엔 시니어 챔피언이 됩니다. 그러나 제인 토빌이 14살 때, 영국 시니어 챔피언이었던 이들은 결별합니다. 산업화 시대 한국인이 대도시 서울을 향해 떠났듯, 토빌의 파트너 마이클 허친슨도 런던으로 떠납니다. 이후 토빌은 몇 년간 싱글 스케이터로서 경력을 이어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 합니다. 토빌 자신은 “싱글 스케이터로 전환하기엔 너무 늦었고, 또 둘이 타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고 말합니다.
혼자 남은 토빌이 잠재적인 파트너로 크리스토퍼 딘을 염두에 두게 된 것은 15살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당시 링크엔 전 아이스댄싱 선수로 영국 챔피언이자 1965년 세계선수권 은메달리스트였던 자넷 소브릿지(1968년 동메달리스트)가 코치로 있었고, 그녀가 토빌과 딘을 팀으로 결성해줍니다. 그러고 보면 토빌은 페어 스케이팅에서 시작해, 싱글, 아이스댄싱까지 피겨스케이팅의 모든 분야를 거친 스케이터가 되겠네요.
크리스토퍼 딘은 아이스댄싱 영국 주니어 챔피언이었습니다. 그의 파트너였던 산드라 엘슨 역시 토빌의 파트너처럼 런던으로 떠났고, 마침 그도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딘 역시 토빌을 알고 있었습니다. 딘은 토빌이 매우 조용했지만, 그럼에도 아이스 링크의 여왕이었다고 말합니다. 토빌은 겨우 열네살의 나이로 그렇게 어린 데도 이미 페어스케이팅 영국 시니어 챔피언이었으니까요. 딘의 첫 기억 속에 토빌이 링크의 여왕이었다면, 토빌이 기억하는 딘의 첫 모습은 어땠을까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딘이 참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딘을 금발의 왕자님(Blonde Prince)라고 부르곤 했죠.”
하하. 여왕 토빌과 왕자 딘의 만남이군요. 그 둘을 짝지워 주고 훈련을 시킨 건 자넷 소브릿지였지만, 직접 파트너가 되면 어떨까하고 제안을 먼저 한 것은 딘 쪽이었다고 합니다. 토빌은 물론 딘이 함께 스케이트를 하면 괜찮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말을 꺼내진 못했죠. 그리고 딘이 자신에게 그런 제의를 한 것도 자신과 딘이 이상적인 조화를 이룰 거라고 딘이 생각했기 때문일 거라고는 지금도 생각지 않는답니다. 일주일만 시험 삼아 연습해 보자던 그들은 그 일주일이 한달이 되고, 1년이 되고, 결국 오늘날까지... 무려 36년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후일 역사에 남을 아이스댄싱팀이지만 초반의 성적은 그리 눈에 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980년 동계올림픽에서 5위를 한 토빌과 딘은 아무런 메달도 없이 새로운 올림픽 사이클에 들어갔습니다. 결코 유리한 시작은 아니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 이후 그들은 갑자기 지배자가 됩니다. 보수적이고, 줄세우기가 심각했던 당시 아이스댄싱계를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었죠. 그만큼 그들은 탁월했습니다. 그들이 그 이전에 비록 눈에 띄는 성적을 올리고 있지 않았더라도 심판들은 그들을 인정하고 마음 속에 각인시키고 있었다고 봐야겠죠.
1981년 유럽 선수권부터 1984년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까지 토빌과 딘은 그들이 나간 대회에서 결코 1등이 아닌 성적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세 개의 유럽 선수권 금메달, 4개의 세계 선수권 금메달, 그리고 1984년 올림픽의 금메달. 올림픽에 아이스댄싱이 공식 종목으로 들어간 1976년 이후의 성적으로 치자면, 그리슉과 플라토프 조 정도만이 이들보다 나은 성적을 올렸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1984년 이후 프로 스케이터로 전향했던 이들이 10년 뒤 다시 아마추어로 돌아오기 전까지 토빌과 딘은 무패의 팀이었죠.
토빌과 딘이 아이스댄싱에 이뤄낸 업적은 단지 그들이 막대한 금메달과 6.0이라는 점수를 쓸어담았다는 데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 이후로 아이스댄싱은 빙판 위에서 두 남녀가 손을 잡고 추는 춤이 아닌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의 파트너십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아이스댄싱이 이야기가 된다면 당연히 남녀 파트너들은 각각 연기해야 할 역할을 맡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남녀 단 두 명의 주인공이 이야기를 몸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면 그것은 연인이라는 설정이 가장 적합하겠지요. 당연히 그들은 그랬습니다. 그들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기점이 될 작품의 하나인 ‘Mack & Mabel’은 실제 영화배우이고 감독이었던 맥과 마벨의 떠들썩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유명한 뮤지컬 곡이었죠. 그들은 마치 한쌍의 연인 같았고, 그것은 이전의 빙판에 옮겨진 볼룸 댄스 같았던 아이스 댄싱과는 달리 매우 극적이었습니다. 클래식했던 아이스댄싱에 뮤지컬 넘버들을 이용해 극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던 토빌과 딘은 올림픽 시즌엔 다시 클래식으로 돌아갑니다. 지금이야 볼레로가 스케이팅과 잘 어울리는 곡으로 인식되어 선수들이라면 한번쯤 가능한 레퍼토리로 떠올려 보겠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스케이팅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느리고 단조롭다고 여겨졌으니까요. 실제로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았는데 이들은 놀랍게도 볼레로를 함께 할 수 없는 연인의 사랑 이야기로 바꿔 놓습니다. 그리하여 앞서 본 것처럼 마침내 높은 절벽에 올라가 함께 몸을 던져 죽는 비극적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빙판에 그려내죠.
그들의 올림픽 퍼포먼스가 열리던 날은 마침 발렌타인 데이였고
, 2천4백만명이라는 사람들이 TV를 통해 그들의 연기를 감상했습니다. 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물론 피겨스케이팅을 모르던 사람들도 피겨스케이팅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관심은 토빌과 딘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스포츠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스포츠 마니아만이 아닌 대중의 볼거리로 자리잡은 1984년의 동계올림픽은 피겨 스케이팅엔 큰 기회였죠. 많은 스타들이 배출되었고 대중의 관심과 상상은 실제 선수들의 사생활로 향합니다. 발렌타인데이에 함께 인생의 중요한 성취를 이룬 토빌과 딘. 그리고 그들은 실제 같은 연인을 연기했죠. 당연히 그들이 사귀는지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수많은 기자들이 그들의 관계를 알아내려 달라 붙습니다. 그리고 사소한 것들도 기사로 써 대죠. 어떻든 토빌과 딘은 탁월한 실력 뿐만 아니라 피겨 스케이팅에 있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좋은 기회를 만난 행운아들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이용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영리하기도 했고요. 사라예보에서 귀국해 영국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들은 그 기회를 깨달았을 겁니다. 공항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으니까요. 그들에게 쏟아진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질문에 그들은 ‘아직은 아니(Not yet)’라고만 답합니다. 그러기엔 너무 바쁘다고요. 예전 우리나라 신문들을 찾아보니 이제 보면 오보인 그들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더군요. ‘올림픽 금메달 커플, 바빠서 결혼은 아직’이라고요. 이제 와서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저 결혼은 언제 할 거냐가 반드시 서로 결혼할 거냐고 묻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딘은 사람들의 기대를 알고 있었고 그것도 자신들의 파트너십의 일부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해피 앤딩을 원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결코 사실을 알리지도 혹은 아니라고 하지도 않았다고요. 나쁘게 말하자면 이용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죠. 그들의 일을 이루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니까요.
아무튼 이들은 공공연한 대중들의 “사귀어라”“연인이 되라”“부부가 되라”는 기대 속에 프로 생활을 이어갑니다. 프로로서도 훌륭한 작품들과 성적을 남기죠. 그러다 1990년 드디어 결혼 발표를 합니다. 물론 각자 다른 사람과요. 토빌은 미국 아이스댄싱 투어 중 만난 록 사운드 엔지니어인 필 크리스텐센과, 딘은 같은 아이스 댄싱 선수인 이사벨 뒤세네와. 토빌은 1990년 이후 필과 여전히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고, 입양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반면 딘은 이사벨과 1991년 결혼한 지 2년 뒤인 1993년 이혼하게 됩니다. 이혼에 이르게 된 원인에 있어 말이 안 나올 수 없었는데 이사벨은 토빌을 거론하며 자신들의 결혼 생활에 존재하는 “또 다른 여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사벨은 프랑스 국가대표로 1992년 알베르빌 올림픽에 출전해 은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언론들은 자국 선수였던 이사벨이 ‘또 다른 여자’라 지목한 토빌에 대해 ‘날아다니는 돼지(flying pig)’라는 악의적인 묘사를 했죠. 어떻든 프로 생활을 계속 하고 있던 토빌과 딘 커플이 각자의 결혼 생활과 별개로 함께 해야하는 시간은 꽤 길었을 것이고, 항상 다정함을 연출해야 하는 것이 직업이다 보니 각자의 배우자들은 가볍게 넘기기만은 힘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영화배우라면 사랑에 빠지는 역할의 여배우가 매번 바뀌기라도 하련만 딘은 한결같이 한 파트너를 상대로 사랑에 빠지는 역할을 해야 했으니까요.) 적어도 이사벨에게는 그랬습니다. 토빌과 딘 정도라면 명망을 갖춘 스케이터들이었고, 이미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으며 각자 코치나 안무가 생활만 하더라도 생계에 큰 지장은 없었을 터입니다. 굳이 프로 생활을 이어가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사벨은 딘이 스케이팅을 그만두길 바랐다고 합니다. 2011년 인터뷰에서 토빌은 그러한 이사벨의 생각이 이기적인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사벨이 얼마나 토빌의 존재를 크게 여겼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딘에게 스케이팅은 즐거움이며 일생의 직업이고 공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스케이팅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 왔습니다. 그런 그에게 스케이팅을 그만두라 한다면 분명 이기적인 발언일 수 있겠죠. 하지만 딘에게 스케이팅은 동시에 토빌이기도 했습니다. 토빌이 없는 스케이팅은 딘에게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죠. 그 점을 이사벨은 그 자신이 아이스 댄싱 선수이기도 했으니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었겠죠. 스케이팅을 그만두는 것만이 자기 아닌 ‘또 다른 여인’ 토빌을 딘의 일생에서 퇴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결과는 알다시피 딘의 인생에서 이사벨이 퇴장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최근 인터뷰에서 딘은 이사벨의 ‘다른 여인’발언에 대해 “그녀는 다이애너비의 말을 인상깊게 들었나봐요”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죠. 카밀라 파커볼스를 찰스와의 결혼 생활에 존재했던 ‘또 다른 여인’으로 표현했던 그 유명한 대사 말입니다.(결국 이사벨의 질투는 혼자만의 망상이었을까요?)
그럼에도 돌이켜 보건대 역시나 토빌은 딘에게 딘은 토빌에게 운명의 여인이고, 운명의 남자입니다. 부부도 남매도 연인도 아니면서 이렇게 오래 팀으로서의 경력을 이어간 스케이터들을 찾아보기가 과연 쉬운 일일까요? 특별한 이 파트너십이 이사벨에겐 의문의 것이고, 두려운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올림픽이 끝나고도 10년간 그들은 프로 생활을 함께 합니다. 그러다 다시 한번 운명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이들은 프로에 대한 아마추어 경기 참가 제한 규정이 풀린 1994년 릴리함메르 올림픽에서 자신들을 확인해보기로 하죠. 결과만 얘기하자면 1994년 유럽 선수권에서 우승을 했던 이들이 3주 후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똑같은 경쟁상대와 맞붙은 올림픽에선 동메달에 그치고 맙니다. 커리어로 본다면 실패이지만 파트너십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들의 유일한 패배는 그들의 관계를 더 돈독한 것으로 만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광의 순간을 향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함께 했고, 함께 절정에 올랐고, 그것을 함께 지켜 갔으며 다시 함께 뼈아픈 패배를 겪어야 했다는 것은 둘의 관계에 있어 또 다른 전기였을 겁니다. 역전의 용사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둘은 실망했지만 다시 프로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딘은 1994년 미국의 싱글 스케이터이자 세계선수권자인 질 트레나리와 결혼합니다. 딘은 빙판 위의 여성을 좋아하는군요.(질과 이혼한 후엔 카렌 바버라는 과거 영국 국가대표 팀메이트이자 전 아이싱 댄스 선수였던 여성과 스캔들이 있었죠)
1998년 밴쿠버에서 마지막 공연을 한 후 딘은 질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토빌은 필과 함께 영국에 남아 자기 삶을 이어가고요. 그렇게 8년이 지납니다. 토빌과 딘은 모두 초반엔 금단 증상을 겪었다고 하죠.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운동을 하러 갈 필요가 없다는 것에 당황했던 것이죠. 딘은 토빌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 통화는 몇 시간씩 이어지기도 했죠. 하지만 대륙을 가로지르는 전화 통화도 세월이 가면서 뜸 해지고 시간도 짧아졌겠죠. 토빌은 아무런 계기가 없었다면 그렇게 자신들의 파트너십도 끝났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다가 2006년 토빌과 딘은 영국 ITV로부터 아이스댄싱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습니다. 둘은 여기에 동의했고, 은퇴 후 8년 만에 나이 오십에 다다른 토빌과 딘이 빙판에 커플로 서게 됩니다. 'Dancing on Ice'는 김연아 선수의 ‘키스 앤 크라이’에도 모티브가 된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8년 만에 만난 그들이 예전과 같은 속도와 기술을 보여주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잘 생겼지만 배가 나온 딘, 오히려 나이들면서 젊었을 때보다 더 여성스럽게 아름다워진 토빌은 확실히 예전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보여줄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파트너십. 아직도 팬들은 그들의 유튜브 동영상 밑에 댓글로 제발 각자 이혼들 하고 당신들끼리 결혼하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들의 아직도 이어가고 있는 성공의 비밀은 바로 이 파트너십입니다.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도 그렇다고 실망시키지도 않는 파트너십. 오늘날 테사 버츄와 스캇 모이어 커플이 받고 있는 그러한 관심과 기대를 36년간 이어 오고 있는 팀이 바로 이 괴물같은 팀이죠. 저는 딘이 파트너인 토빌을 바라보는 눈빛, 그들의 스킨십, 리프트에서 토빌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동작, 토빌을 보고 자신의 스케이팅 속도와, 동작을 조정하는 딘의 모습을 좋아합니다.(물론 컴페티션을 준비할 때의 딘의 짜증은 소문난 그대로죠. 거기에 격렬하게 맞붙지 않는 토빌이기에 오늘날까지 파트너십은 이어져 온 것일 거고요. 다만 이제 둘은 더 이상 그런 짜증과 긴장을 갖고 공연을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Dancig on Ice는 큰 성공을 거뒀고, 영국에서 아이스쇼 투어를 갖게 되었으며 시즌제로 매년 기획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필연적으로 딘은 가족이 있는 미국을 떠나 영국에 몇 개월씩 머무르게 되었죠. 이것이 문제였던 걸까요? 딘의 결혼 생활은 삐걱댔습니다. 결국 2010년 봄, 질과의 16년간의 결혼 생활은 ‘잘’ 끝이 납니다. 딘의 상황을 토빌 역시 알고 있었냐는 질문에 딘은 대답합니다.
“제인에게 다 털어놓은 것들입니다. 그녀는 나에게 그런 사람입니다. 무언가가 변할 때 사람은 전쟁 같은 시기를 겪게 되죠. 제인과 나는 매일 전화로 얘기했습니다.”
토빌은 딘에게 ‘그런 사람’입니다.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그가 힘들 때 믿고 털어놓을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
토빌은 둘의 관계에 대해 1994년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고치와 같은 아주 작은 세계 안에서 순수했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매우 외로웠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애착을 갖게 되었어요.”
운동만 하는 선수로서의 고립된 작은 세계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했던 그들은 직업상의 파트너이자 유일한 친구이기 쉬웠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연인이나 부부가 아니었던 것이 성공적인 파트너십의 중요한 부분이겠죠. 결혼으로 둘 사이의 이야기가 갖는 매력이 감소되거나, 아니면 서로의 믿음직하지 못한 행동으로 파트너십에 금이 가면서 사람들의 환상을 깨뜨리지도 않았다는 것.
일주일간 시험 삼아 해보자던 파트너십은 36년을 이어졌습니다. 처음 그 때 딘과 토빌은 이제 우리 이렇게 계속 해 나가자라는 동의를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딘은 지금까지도 토빌에게서 통지가 있을 때까지 계속 맞춰보고 있는 것이죠. 평생을 약속한 관계를 두 번이나 끝내야 했던 딘은 오히려 일주일을 약속한 관계는 평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1년 “왜 제인과의 관계는 나의 다른 두 아내와의 관계보다 더 오래가는가: 크리스토퍼 딘 마침내 제인 토빌에 대한 감질나는 질문에 답하다”라는 매력적인 제하의 기사에서 기자는 딘에게 “당신의 일생에 그밖에 다른 누군가가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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